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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8월 말,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인생 첫 산행으로 후지산에 올랐다.
아니, 산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그냥 "무모한 도전"이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그때 나는 그저 평범한 학생. 딱히 눈에 띄지도, 말썽을 부리지도 않던 타입이었지만,
공부도 하고, 과외도 하고, 학원도 다니고, 수영도 하고, 태권도부 만들어서 공연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많은 걸 했을까 싶은, 체력도 패기도 넘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바쁘게 보내던 첫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우리 후지산이나 한번 올라가볼래?"
(지금 생각하면 진짜 아무 생각 없던 고등학생들의 무모함이란…ㅎㅎ)


🗻 후지산이 뭐냐면요

일본에서 제일 높은 산. 해발 3,776미터.
한라산이랑 비슷하게 여름 한정 개방이라 그 시기를 딱 맞춰야 올라갈 수 있었고,
운 좋게도 우리가 그 타이밍에 맞췄던 거다.

대충 9명이 모였고, 등산 날짜 전날까지도 나는 에너지가 넘쳤다.
그날도 CD 하나 사겠다고 자전거 타고 왕복 한 시간 거리 달려갔다 왔으니 말 다했지.
(그땐 왜 그렇게 체력에 자신이 있었는지… 지금은 생각만 해도 숨차요)


⛰ 드디어 출발

짐을 싸는데 아버지가 땅콩이랑 초콜릿을 챙겨주셨다.
"배고플 테니 이거라도 먹어라."
그땐 속으로 ‘이걸로 어떻게 배가 차지?’ 했지만…
나중에 진짜 엄청 고마웠다. (아빠, 그땐 몰라봐서 죄송…)

신주쿠역에서 후지산 가는 버스를 타고, 1500미터 고지에 내려 등산 시작.
아버지가 두 가지를 꼭 챙기라고 하셨는데, 하나는 방울 달린 나무스틱(일명 지진봉),
하나는 산소통. 올라가면서 스틱에 도장을 찍을 수 있고, 방울은 뱀 쫓는 용도라고.
(지금도 후지산 가면 이거 팝니다 ㅎㅎ)


🥵 등산은 나랑 안 맞는 걸로…

등산 시작하고 10분 만에 깨달음.
"아… 나, 등산이랑 안 맞는구나."

체력 좋은 친구들은 벌써 앞서고, 난 중간과 후미를 왔다 갔다.
휴게소에서 쉬고, 도장 찍고, 초콜릿 먹고, 또 걷고… 반복 반복.
그중 한 친구는 산소 부족으로 거의 탈진 직전까지 갔는데, 나중에 보니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있었…😑
(고산지대 + 흡연 = 아주 나쁜 조합)


🌅 그 순간, 해가 솟다

힘겹게 올라가던 중, 누군가 외쳤다.
"해 뜬다!!!"
뒤돌아보니 진짜 기가 막힌 광경.

구름이 발아래에 있고, 그 사이로
계란 노른자처럼 ‘뽕’ 하고 해가 올라오는데
잠결에도 눈이 번쩍 뜨였다.
해가 정말 빨리, 쭈우우욱 올라오는 그 모습…
지금까지 살면서 본 가장 멋진 해돋이였다.


🎉 정상 도착!

드디어 정상 도착!
친구들과 유치하게 "야" 외쳐보고,
사진도 몇 장 찍었는데,
그땐 스마트폰은커녕 디지털카메라도 없던 시절.
필름카메라로 막 찍었고,
막상 인화해보니 정말… 막 찍었더라. 😅


🔻 내려가는 길은 더 고됐다

정상 정복의 기쁨도 잠시, 내려가는 길이 더 힘들었다.
후지산은 활화산이라 산 전체가 붉은 모래.
등선 따라 꼬불꼬불 내려가는데,
무릎도 아프고, 발목도 꺾일 것 같고…

그런데 거기서 자전거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 발견.
(아니 언제 그걸 가지고 올라간 거야?)
그때 그 자전거 정말 부러웠다. 지금도 기억남. 정말 부러웠다…


🍛 마지막은 역시 ‘카레’

고생 끝에 신주쿠에 도착해
친구들과 마지막 코스는 카레집.

사실 그냥 평범한 카레였을 텐데
그때 그 순간, 그 배고픔에 먹은 카레는
인생 카레였다.
지금도 그 맛이 잊히질 않는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등산을 인생에 비유하는 이유.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올라갈 땐 힘들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고,
내려갈 땐 지치고 허무하지만,
정상에서 보는 그 한순간의 풍경은
그 모든 걸 잊게 만들어준다.

그 여름, 후지산은
내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순수한 도전 중 하나였다.
지금도 그때 그 친구들, 그 땅콩 초콜릿, 그 해돋이, 그리고 그 카레…
가끔씩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갑자기 아버지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후지산은 한번가는 사람은 있어도 두번가는 사람은 XX이다. ㅋㅋ

 

 

 

P.S. : 나중에 본가를 가게 되면 그때 찍었던 사진이 있으면 스캔하거나 폰카로 찍어서 다시 올릴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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